
대관습에 밀린 벼랑 끝 생명
연극 <예라고 하는 사람,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을 바탕으로 -
으레 따르고 정렬하던 현상에 느닷없는 균열이 비집고 들 때, 낯선 찰나를 거침없이 나아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 순간을 관통하는 병렬적 인과 과정은 우리에게 낯설게 바라보는 또 다른 찰나를 제공한다.
독일 유명 희곡작가 베를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의도하던 것은 이와 같은 소격 효과(Verfremdung)가 발현되는 순간이다. 당시 <예라고 하는 사람>과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 그리고 오늘날 <예라고 하는 사람,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 모두 공동이성과 수행해내기 어려운 운명 간 충돌을 토로한다. ‘아니’란 답변보다 더 잘못된 질문에 맞서 관습을 새로이 하려던 소년, ‘아니’라고 살고 싶어 하던 세연 모두 선택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선택이 거세당한 구조에 놓여 있다. 본인의 신체가 곧 사회적 낙인으로 각인되어 사회적 존재임에도 사회적 참여는 불가능한 상태는 관계적 배제로 사회적 생존권을 박탈당한다. 인간 존엄성이 무엇인지 관객에게 물음을 던진다.
존엄이 침해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이에 따른 사회적 문제는 청소년 등장인물들에 뚜렷하다. 청소년은 순응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다중적 삶을 다뤄야하는 대상이다. 돌봄, 생존, 삶의 결정권 등 다중적 삶에서 자기다운 삶과 사회적으로 의존을 오고 가는 게스투스(Gestus)가 스포트라이팅된다. 행위 주체로 고립과 비난을 피하려고 실질적 동의(Actual Consent) 없이 부조리적 상황에서 의제 동의(Fictional Consent)에 짓눌린다. 프랑스의 문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가 가리키던 ‘이방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세연은 존재에 대한 확실성을 확신할 수 없다. 시스템이 계속해서 불리하게 몰아냄에 따라 최대 다수의 행복을 위한 공리주의를 선택해야 할지,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될 의무론을 취해야 할지 모호해진다. 세연은 ‘예’라고 추정적 동의(Presumed Consent)를 하든, ‘아니오’라고 고립된 발언(Isolated Voice)을 하든 비가시적 트롤리에 빠져버린다. 마치 생명을 살릴 것(고령자나 기저질환자를 살려 사망률을 감소)인지, 시스템을 살릴 것(의료진이나 필수 노동자를 살려 사회 기능을 유지)인지 의료 불균형 상태였던 팬데믹 같다.
브레히트에게 이런 상황은 ‘생산’과 직결한다. 선한 의지와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자세, 도움이 되고자 하는 자세 모두 생산력을 모든 속박에서 해방하려는 투쟁이다. ‘친절’이 가능하도록 새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이다. 자유와 정의를 포함한 투쟁 말이다.
극 중 좀비는 행위 주체자가 일관된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을 만한 지배적 아이디어 없이 자동기계와 흡사하다. 사물과의 유사함을 드러내 생명이 없는 움직임으로 자유주의자의 특정 부분만 재생되는 모양새다. 생명을 대관습에 들먹이는 부조리극에 반행동(anti-action)하는 등장인물 같다. 좀비가 무대에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지만 인간과 좀비라는 존재의 극명한 대비는 극 중간 배우들의 몸 개그나 유머 코드 묻은 대사보다 희극적이다.
브레히트는 어린이청소년에게 정신적이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길 강조했고 자기 계발이 가능토록 합리적 비판사고를 강조했기에 브레히트의 예술관으로 좀비는 인간과 대비되어 학습극을 설정한다. 브레히트는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을 집필한 뒤 학생들에게 보여줬는데 학생들은 내용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론을 번복하는 식의 내용이 아니라 본질적인 해결이 가능한 내용을 요구했다. 연극을 매체로 참여자의 행동과 태도, 의식을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학습극은 기능을 다한다. 학습극은 청소년 교육, 폭력 예방 교육 등 참여자의 삶 전반에 대한 변화와 치료를 목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 한참 예민한 청소년이 성찰하고 건강한 사회를 위해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한다. 현실의 청소년들에게 보이지 않는 좀비가 도사리고 있다. 학교폭력과 디지털 그루밍 등 위험에 노출된 환경에서 인간적 다가감이 부족할 수 있다. 세연처럼 벼랑 끝에서 자살을 고민하는 사회적 병리 현상은 특히 가을에 야속하게 심해진다. 청소년들의 2번째 학기 시작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학습극은 토론연극, 연극치료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예라고 하는 사람,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 또한 어린이청소년 학습극이자 연극 치료제로 제안된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경쟁과 속도에 집중한 사회 틈에서 연극 포스터를 도배한 말풍선 문장은 꽤 익숙하다.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선택을 미뤘다.’, ‘능력은 같은 출발선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경쟁은 탈락자를 전제로 한다.’
청소년들이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해주려면 전기작업이 필요하다. 연극 <예라고 하는 사람,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이 ‘예’와 ‘아니오’라고 나누었다면, 그 사이 청소년 참여자의 직접적 전기작업과 재생연극으로 정체성과 자아 존중감을 드높여줄 수 있다. 공연 시간이 길어지는 대신 뜨겁고 따끔한 삶의 연속체가 생성되는 것이다. 해당 연극이 아동·청소년들에게 학습극으로 밀도를 높이는 다음 단계는 바로 여기서부터다.
내용에서 완전한 논리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원작에서는 소년이 전염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무리 사이 여행을 견뎌내는 것이 버거워 뒤처지는 것이 문제다. 소년의 신체 자체는 전염에 있어 안전한 상태다. 의사 여부를 차치하고 물리적인 측면만 보았을 때 무리가 소년을 언제 어떻게 할지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재창작극에서 세연은 힘든 상황에서 단순히 다른 이들에게 불편함을 주거나 귀찮은 정도가 아니다. 좀비 바이러스라는 감염 보유자로 의심받는 대상이다. 전염에 있어 안전함이 보장된 존재가 아니라 접촉 자체에 관한 불신을 지핀다. 세연의 (혹시 모를) 바이러스 발발에 따라 급작스럽게 무리는 물리적인 방어태세를 취해야 한다. 원작에서는 개인과 다수 간 관계가 선택 여부에 있어 대등한 거래로 이어지는 느낌이라면 재창작물에서는 개인과 다수 간 교환부담이 기울어진 편이다. 좀비 장르 자체가 K-콘텐츠에서 흥행요소로 떠오르는 만큼 시도는 좋았으나 전염병을 좀비 바이러스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조금 더 정교한 설정이 필요했다. 교사와 세연이의 대화법과 말투가 직설적이지 않고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부드럽게 대사로 표현한 것은 해당극을 볼 어린이청소년들에게 학습적 효과를 줄 수 있으리라 예상한다. 특히 공연 시작 전 제공된 대본집을 거듭 읽어보게 된다면 희곡 속 주요장면 대화법을 체화할 수 있을 법하다. 입장 전 대본집과 질문카드를 받는데, 청소년 관객들이 실감공연 후 주제를 곱씹어볼 수 있도록 질문카드를 활용하게 하고 교육키트화하는 가능성도 엿보인다. 청소년 단체 관객이 공연 관람 후에 삼삼오오 짝지어 카드 질문과 응답을 서로 이야기해보고, 교육적인 별도 세션을 이어보는 식으로 말이다.
무대 디자인적으로 소극장 무대에서 요란한 대소품 이동이나 부대전환 없이 깔끔하게 옥상을 표현한 점이 인상 깊었다. 다만 공연 중에 옥상철문을 여닫는 소리가 가끔 너무 컸다. 배우들의 힘 조절 때문인 듯한데, 배우마다 성량 차이가 크고 소극장에서 듣기에는 소리가 너무 큰 배우도 있었다. 큰소리는 재미난 대사에도 관객 반응이 없을 때, 한 번씩 강조형으로 주위를 환기해 주는 정도면 충분하겠다. 오프닝 부분의 음산한 부분을 제외하고 음악과 조명 부분이 복잡하지 않은 편으로 기억한다. 원작에서 합창단이 있는 것처럼 효과음 외 귀를 자극하는 소리가 더해지길 제안한다. 음성적 아름다움이 적당한 편안함과 다채로움을 덧칠할 것이다.
내게 <예라고 하는 사람,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은 브레히트라는 인물의 변증법을 빌린 학습극으로 거듭나고자 한 작품이었다. 작품을 접한 다른 관객들에게도 대관습에 아슬아슬한 생명이 정반합으로 오버랩되는지는 멀어져야 보일 테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는 낯설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긴장을 독자들도 공연 현장에서 새로운 관습과, 새로운 규칙으로 전달받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