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짝짝이 양말과 혼종의 정체성
그리스 신화에는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정신은 인간으로 남은 혼종의 존재들이 등장한다. 신화는 이 분류될 수 없는 ‘괴물’들을 제거해서 공동체의 질서를 되찾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봉합한다. 비록 그들은 억압될 뿐, 모습을 바꾸어 이 세계에 다시 귀환하지만 말이다. <영지>는 이처럼 신화적인 혼돈의 상태, ‘새의 머리, 인간의 몸통, 개구리의 다리’를 가진 ‘내일도 다르고 모레도 또 다른’ 아이의 존재로 막을 연다. 이 형상은 영지의 제1 언어인 수어와 소리꾼의 노래가 교차하는 가운데 묘사된다. 짝짝이 양말을 신고 무대를 활보하는 영지는 ‘가장 깨끗한 동네 1위’로 뽑힌, 순수함에 대한 강박에 갇힌 마을 ‘병목안’에 놓여 있다. 그는 이곳에서 뿔, 털, 뼈로 불리는 ‘악마 선생’들을 소환한다. 아이를 반듯한 길로 인도하는 ‘선생님’의 이미지와 정도를 위반하는 ‘악마’성, 그리고 ‘핑크색 머리에 사슴뿔’, ‘턱 밑으로 청바지 털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는 묘사는 영지의 자기소개만큼이나 이질적인 것들이 모순적으로 공존하는 모양새다. 이들은 함께할 수 없는 것들이 욱여넣어진, 존재 자체가 경계를 위반하는 자들로, 병목안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불온한 이방인이 된다. 19세기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은 ‘모든 아이가 이방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기존 체제에 길들지 않는 영지의 타자성은 병목안이라는 꽉 막힌 세계에 숨구멍을 내는 광기와 충동, 즉 예술적 에너지로 전환된다.
병목안의 아이들은 고학년이 되면 마을의 규격에 걸맞은 신체로 갈아 끼워지거나, 네모난 학교에 맞추어 동그란 모서리가 깎여 나가는 잔혹한 성장 서사 속에 살고 있다. 엄마의 연락이나 학원 알림과 같이 기성의 규율이 아이들을 옥죄는 순간마다 시청각적 기호를 넘어선 과장된 진동이 무대를 넘어 객석까지 엄습해 온다. 영지는 어른들의 세계에 자신을 맞추느라 구역질을 참아내는 ‘천사’ 효정과 ‘모범생’ 소희에게 시체 역할놀이를 제안한다. 영지에게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하는 성장은 시체가 되어가는 과정, 곧 죽음과 다름없는 것이다. 영지는 악마 선생들의 주문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자가 된다. 그는 악마 선생들에게 극중극으로써 서사를 보여주기 전, 병목안의 규율에 순응하는 소희와 효정에게 먼저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영지의 이야기는 흡사 괴담으로 번역되며 끝을 맺지 못한다. 이는 영지가 마지막 이야기를 만든 다음, 신뢰할 수 없는 ‘마녀’가 되는 상황과도 맞물린다. 그는 병목안에서 자신의 언어로 계속해서 말하지만 ‘들리지 않는’ 이로 존재하며, 이는 역사적으로 여성, 아이, 장애인에게 반복되어 온 배제의 구조를 생각나게 한다. 영지의 이야기와 놀이·주술 속에는 시체, 해골, 도끼, 켄타우로스, 그려선 안 되는 양배추, 설사, 두드러기 등이 등장한다. 사회가 공동체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밀어내는 이물질들(Abject)의 모임이다.
무대 가운데에 걸린 ‘병목’의 이미지는 소주 광고의 의례적인 문구처럼 겉으론 투명해 보이지만, 그 안은 어른들만 진입할 수 있는 혼탁한 알코올의 세계다. 깨끗함이라는 이미지는 기성세대가 감추는 또 다른 광기와 병목현상과 같은 폐쇄성을 은폐하는 겉포장에 가깝다. 메를린은 마을 아이들에게 규율을 위반하는 상상력과 병을 불러들이는 주술을 퍼트린 죄로, 솎아 내야 할 불순물로 지목된다. 대중들은 낯선 현상이나 통제되지 않는 하위문화를 마주할 때 공포를 느끼고, 그것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포기한 채 곧장 하나의 전염병으로 명명해 버리곤 한다(Étienne Balibar). 메를린으로 분한 영지가 퍼트렸다는 전염병의 우스꽝스러운 병명 “레인보우파바박초딩빠스뿜증후군”은 이러한 메커니즘을 희화화한다. 병목안 주민들은 메를린을 불태우자고 외친다. 화형의 충동은 질서의 자명함을 흔들고 정상성을 위협하는 존재에게로 향한다.
그런데 신화에서 억압된 것이 돌아오듯, 마녀 메를린은 아이들의 환생식을 거쳐 되살아난다. 영지가 만든 이야기 속 캐릭터인 ‘인형 머리를 단 연필, 나비가 든 소주병, 노파, 효정이말, 김소희통나무, 뿔, 플로렌스박, 김소피아’ 등 병목안의 모든 잔재들이 제단 앞에 한데 모인다. 무대 한편을 차지하던 소주병 그림이 찢기자 수천 마리의 종이 나비가 흩날리기 시작하며, 조명은 천진한 노란빛에서 벌레 떼를 연상시키는 붉은빛으로 뒤바뀐다. 무키무키만만수의 노래 ‘벌레벌레벌레’가 지닌 괴기한 에너지와 함께 종이 벌레들은 객석을 침범한다. 동화적이었던 무대는 순식간에 그로테스크한 질감으로 전환되고, 화형식이라는 정화의 의례가 끝난 후 모두가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오염의 의례가 뒤를 잇는다. “환생”은 잠자리 머리, 개구리 다리, 티라노 꼬리를 지닌 돌연변이를 언어의 차원에서 생산해 내며, ‘정상’적인 성장 서사로부터의 탈주를 의미한다.
“나는 영지”라는 소리꾼의 노래로 시작한 이 극은 “우리는 / 내일도 모레도 또 다를 거야.”라며 주어를 확장한다. 이는 고정된 관념을 거부하는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한 주술로, 영지가 퍼뜨린 것은 단지 틀을 뛰어넘는 상상력이었다. 극을 시작할 때 영지는 자신의 공간에 있는 계단 서랍이 ‘연극 무대라서 안 열린다’고 말하며 허구성을 강조하지만, 정작 극의 절정에 다다라서는 계단의 상층부가 열리며 그 틈으로 빛이 삐져나온다. 그곳은 병목안이라는 서랍 틀에 갇혀 있던 이들을 내보내는 새로운 통로로 기능한다. 이러한 변화는 영지가 추구하던 해방의 감각이 다른 세상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라, 연극 무대라는 예술의 장 안에 내재해 있음을 드러낸다. 영지는 이야기를 하는 자로서, 변신을 도모하고 경계를 휘젓는 예술가와도 같은 존재다.
농 세계의 자연화와 감각의 시차
<영지>의 무대에는 비비드한 가구들과 오브제로 시각적 포인트가 구성된 대신, 수어의 비수지 표현(얼굴 표정을 통한 수어의 문법 요소)이 도드라질 수 있도록 배경의 채도가 파스텔 톤으로 조정되어 있다. 오른편에는 소리꾼이 선글라스와 흰 장갑을 끼고 장구 앞에 앉아 있다. 그는 ‘음성 통역사’라는 역할로 불리지만,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각언어를 리듬과 운율의 청각적 감각으로 재배치한다. 판소리의 도창 형식을 빌려 영지의 서사를 1인칭 혹은 3인칭으로 노래하는데, 가사에 담긴 정보량은 기존 대본 텍스트보다 간략하다. 노래는 극 중 띄엄띄엄 불거져 나와 정동을 증폭시킨다. 영지의 ‘말’은 때로는 한글 자막이나 노래가 붙지 않는 수어만으로, 때로는 경쾌한 가락의 판소리와 함께 전달된다. 이는 농인과 청인 관객에게 각기 다른 공백을 남긴다. 정보는 고르게 분배되지 않고 어느 한 언어도 다른 언어를 위해 친절하게 번역되지 않는다. 관객은 그 빈자리를 상상으로 채우거나, 정보에서 소외되는 시간을 견뎌야 한다.
다만 소리꾼의 노래가 풍부한 청각적 질감으로 확장될 때, 극장 구조 안에서 이에 온전히 접근할 수 있는 쪽은 결국 청인 관객이다. “거짓말이야”라는 가사가 반복되는 옛 가요가 길게 흘러나올 때, 우리 모두에게 도달한 메시지에는 번역될 수 없거나 오역된 정보의 오차가 담겨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상기되기도 했다. ‘수어 연극’의 중심에 청각 예술이 배치되는 순간 발생하는 이 비대칭성은, 다수자의 감각을 우선시하는 일종의 자국화 번역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언어 간 번역이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한계와 긴장을 전면에 노출하는 쪽을 부러 택한 듯하다. <영지>는 처음부터 모두에게 완벽하게 이해되기를 포기한 자리에서, 수어를 “대충” 번역할 것이며 “(농인 배우인) 나에게 집중해”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한국어와 한국 수어의 전환이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곤란함, 그리고 농문화와 비장애 문화의 간극을 적극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보다 더 서로의 언어와 존재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마련한다.
음성언어는 흐르는 시간 위에서 한 글자씩 선형적으로 배열된다. 반면 수어는 손동작의 궤적과 얼굴의 표정 등이 3차원의 공간 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공간의 언어라 할 수 있다. <영지>에서는 무대에 존재하는 유일한 청인 배우조차 음성언어로 발화하지 않는다. 청인 중심의 구어가 소거된 무대에서, 농인의 세계는 예외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자연화된다. 영지를 병목안에서 배제하려는 마을 사람들의 적의는 장애라는 타자성이 아니라 기성 세계의 요구에 반하는 저항성을 겨냥한다.
소실점이 없는 어린이의 세계
공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영지는 병목안이 제시하는 아이들의 미래상을 거부한다. 바른 아이가 되어 바른 어른으로 성장하는 직선적인 시간 대신, 죽음과 환생이 뒤엉키는 비선형적인 시간을 상상한다. 근대 사회에서 아이는 미래 그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져 왔다. 다만 이때의 아이는 이미 정해진 궤도로만 나아가야 하는 통제의 대상이다. 사회는 아이가 어떤 미래를 선택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규정하며 이를 위해 규율을 만든다. 병목안에서도 아이들을 ‘정상적으로’ 성장시키려는 어른들의 욕구와, 그러한 미래로의 포섭을 거부하는 영지의 존재가 충돌한다.
어린아이들의 그림에서는 원근을 만들어내는 소실점을 찾기가 어렵다. 초등학교 고학년을 앞둔 영지는 사람을 둘러싼 배경과 구조, 즉 풍경화를 그리도록 교육받는다. 그는 교실에서 특정한 시점에서 본 세계를 재현해야 하는 과제와 맞닥뜨린다. 하지만 풍경화를 그리지 않으면 집에 못 갈 수 있다는 교사의 압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상적인’ 풍경화의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양배추로 별안간 그림을 ‘오염’시킨다. 교사의 목소리는 극 중 노래를 제외한 유일한 음성언어 대사로서, 딱딱하고 권위적인 남성의 TTS 기계음으로 흘러나온다. 영지는 풍경화를 그리지 않는 것에서 나아가, 양배추를 그리지 않을 수 없는 능동적 행위를 되풀이한다. 이처럼 기성의 규범에 대한 거부는 극 안에서 여러 방식으로 변주된다. ‘그릴 수 없음, 자랄 수 없음’과 같은 이 모든 ‘할 수 없음’들은 결핍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저항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저항의 지평과 반대 선상에 있는, 기성에 의한 통제의 역사는 너무나 잔혹하다. 2004년 미국에서, 뇌 질환으로 평생 영아 수준의 인지 발달에 머물 것이라는 진단을 받은 여섯 살 소녀 애슐리에게 성장 억제 조치가 가해진 일이 있었다. 이른바 ‘애슐리 치료(Ashley Treatment)’로 알려진 이러한 선택은, 정신이 더 이상 발달하지 않을 것이라 가정되는 아이의 몸을 부모가 계속 돌볼 수 있는 작은 크기로 머물게 하려는 데 명분이 있었다. 아이이자 장애인인 신체는 종종 고유한 시간성을 박탈당한다. ‘언제 어떤 모양으로 자라야 하는가’에 대한 결정권은 어른의 손에 맡겨진다. 영지는 ‘성장’이라는 통과의례를 신체 절단의 이미지로 반복해서 환원한다. 도끼 선생은 통나무처럼 꿈쩍 못하는 동그란 아이들의 몸과 정신을 네모난 학교의 틀에 맞게 다듬으려 한다. 영지와 친구들이 함께 벌이는 ‘시체 놀이’에서는 인형 머리 연필이 깎여 나갈 때 무대가 진동하며, 아이들의 고통과 불안이 감각적으로 전이된다.
마을 사람들이 메를린을 불태우자, 아이들은 함께 오염되어 다시 태어나는 의식으로 응답한다. “우리는 / 또 다를 거야”라는 선언 속 ‘우리’는 타자를 흡수해 하나의 정체성으로 수렴하는 공동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변화와 흔들림을 거듭하면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연대의 감각 안에 ‘영지’들이 존재한다. 영지는 이곳이 유일한 세계가 아니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가능성을 상상하는 예술가다. 그가 들려준 마지막 이야기에서 어린 물고기는 결국 투명한 다리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그곳이 어디든 어린 물고기가 자유롭게 유랑할 수 있는, 끝없는 변신의 세계이기를 그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