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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인간’은 주체인가?
아이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어른이 되면 내 맘대로 다 할거야!" 잔소리 하는 엄마와 선생님들을 퉁명스럽게 올려다보며 한 번쯤 다짐했던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 드디어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났다. 무얼 먹을지, 입을지, 어떤 작품을 볼 지와 같은 소소한 일상의 선택에서 더 이상 허락을 구할 필요도 잔소리를 들을 일도 사라졌다. 그러나 그토록 기다려왔던 '내 맘대로의 세계'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경제적 자유라도 얻으면 가능해질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 밖으로 밀려났을 뿐, 삶의 선택의 순간마다 마음 속에서 훈수를 두는 또 다른 어른들의 목소리를 관리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자, 그렇게 마음대로 먹다가는 인슐린이 폭발하고 말 거야!' '이 책은 꼭 읽어야 하지 않겠니?' '저런 옷을 입고 갔다 가는 낭패를 볼 텐데!' '너무 피곤하니까 예매를 취소할까? 하지만 중요한 작품을 놓치면 아쉬울 걸…' 어른이 되자 바깥의 잔소리꾼들은 사라졌지만 그 목소리들은 어느새 내 안으로 떡하니 들어와 터줏대감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 수많은 목소리들의 볼륨을 스스로 조절해야 한다. 심지어 선택을 도와주는 AI 비서까지 두게 된 지금, 또 다른 질문에 봉착하고야 말았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 질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답은 생각보다 간단치가 않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일까?
나는 '주체적인 인간'을 떠올렸을 때 자신의 의지로 판단하고 스스로 선택하며 그 선택에 따라 행동하는 독립적인 존재를 떠올렸다. 그러나 한 해, 한 해 어른의 나이테를 그려가면서 '내 맘대로' 삶에 선을 긋는 일이 그리 녹록지 않음을 실감하곤 했던 것이다. 진정 인간은 삶 속에서 독립적으로 사고 하고 결정할 수 있는 존재일까? 나는 내 삶의 온전한 주체인가?
사실 그렇지 않으면서, 또 그러하다. 내가 내렸다고 생각하는 결정 하나에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과거의 경험이 스며들어 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형성해온 관계와 분위기, 내가 속한 사회의 통념과 가치, 타인의 기대와 시선도 나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때로는 경제적 조건이나 우연한 사건처럼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이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며 심지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묵직하게 감당해야 한다. 인간은 타인과 환경, 기억과 사회, 수많은 관계와 조건 속에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독립적이면서도 비독립적이고, 주체적이면서도 동시에 비주체적이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어린이의 주체성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어른조차도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기 의지만으로 결정하지 못한다면 어린이에게서 주체성은 무엇을 의미할까?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어린이의 주체성
어린이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어른들의 세계 위에 태어난다. 자신이 태어날 장소도, 가족도, 언어도, 문화도 선택할 수 없다. 한동안은 무엇을 먹을지, 어디에 갈지, 언제 자고 일어날지조차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처지이다. 어린이의 삶을 둘러싼 대부분의 조건은 어른들에 의해 주어진다. 그렇다면 어린이는 그저 어른이 마련한 조건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일까?
나는 오랫동안 어린이들과 연극을 만들고, 놀고, 공연을 하면서 어린이들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는지를 수없이 관찰해왔다. 경이로운 목격이다. 어린이들은 주어진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만은 않는다. 그 안에서 바라보고 반응하며 거부하고 선택하고 때로는 어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상황을 반전시킨다. 주어진 조건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더라도 그 조건과 어떻게 관계 맺고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는 어린이 자신의 방식이 존재한다. 어쩌면 어린이를 '주체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린이에게 모든 결정권을 넘겨준다는 뜻도, 어린이를 어른과 동일한 독립적 존재로 간주한다는 뜻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미 관계와 조건 속에 놓여있는 어린이가 그 세계에 끊임없이 반응하고 영향을 미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세계와 관계 맺고 있음을 발견하는 일에 가깝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면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어린이'를 '인간'으로 바꾸어도 사실 큰 차이가 없다. 관계 속에 놓여있으면서도 그 관계에 반응하고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는 점은 어린이만의 특성이 아니라 인간 모두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린이에게서 유독 드러나는 것은 무엇일까? 어린이라는 존재가 세계와 관계 맺는 독특한 방식은 무엇이며, 그것은 이미 어린 시절을 지나온 어른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나는 '주체성'이라는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또 하나의 성질을 생각하게 된다. 바로 ‘어린이성’이다.
어린이성, 예술행위의 조건
교육과 발달이론에서 어린이들의 '발달적 미숙'이라고 칭하는 면모를 예술의 눈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어린이들에게서 오히려 놀라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여섯 살 아이가 밖에서 놀다가 넘어져 울며 들어왔다. 잔뜩 화가 나 있다.
"엄마, 내가 돌에 걸려서 넘어졌는데 지나가는 개가 “바보”라고 놀렸어! 가로등도 “아주 그냥, 잘됐네!”라고 했고 비행기도 “메롱” 하면서 가버렸어!" 길에서 넘어져 부끄러워진 아이에게 주위의 모든 세계가 자신을 향해 놀림과 비난의 화살을 쏟아내고 있었다.
또 다른 어린이는 너무 슬픈 나머지 얼굴을 눈을 꼭 감고 두 무릎에 파묻고 외쳤다. "온 세상에 불을 꺼버렸어!" 1)
연극놀이 수업에 쓸 곡을 고르며 영화의 OST 곡들을 재생시키고 있을 때 곁에 앉아있던 5학년 한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잠깐만요. 저 이 곡을 알아요! 이것은 고독에 대한 거예요!" 그리고 움직여볼 것을 제안하자 그 아이는 마치 살풀이와 같은 춤사위를 추기 시작했다.
이들의 세계는 얼마나 시적인가!
돌과 개와 가로등과 비행기가 모두 나와 관계를 맺고, 나의 슬픔 하나로 세상의 모든 불이 꺼진다. '앎'에 대한 감각은 데이터가 아닌 내면에서 피어난다. 현실과 상상, 나와 세계의 경계가 아직 단단하게 분리되지 않은 이 감각은 예술가들이 세계를 바라보고 무대 위에 또 다른 언어로 구현하는 방식과도 연결된다. 어린이들이 바라보는 세계의 시적 진실은 예술가들이 바라보는 세계와 닮아 있다. 많은 예술가들이 어린이에게서 또는 자신의 어린시절로부터 영감을 얻곤 한다. 칸딘스키는 어린이에게 "사물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자연스러운 능력"이 있으며, 그 때 "사물의 내적 울림은 저절로 드러난다"고 보았다2). 어쩌면 예술가란 어린이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 세계와 관계 맺던 방식을 어른이 되어서도 어딘가에 간직한 채 그것을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나이 든, 여전한 어린이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린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 역시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어린이를 나와 분리된 하나의 대상으로 놓고 그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 내기보다, 먼저 나 자신의 진실한 느낌을 향해 질문을 돌려보는 것이다. 어린시절의 경험을 떠 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시절의 내가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있었고, 어렴풋하게 나마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한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
그런데 어린이 공연예술의 현실에서 어린이는 작품의 가장 중요한 관객이면서도 정작 그 작품을 선택하는 사람은 아닌 경우가 많다. 어떤 공연을 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첫 단계에서 선택권은 대부분 부모나 교사에게 있다. 이것은 어린이 공연예술에 종사하는 창작자들에게 때때로 묘한 좌절감을 안겨준다. 마케팅의 언어를 어른의 입맛에 맞추어야 할 때가 있고, 작품의 소재 역시 교훈성이나 교육적인 요소를 가미할 것을 요구 받기도 한다. 그 여러 단계를 넘고 나서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 어린이 관객들이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는 무수한 유기적인 관계가 발생한다. 어른인 창작자는 자신이 주목하는 주제를 선택하고 장면의 구성과 디자인을 결정한다. 편집되고 디자인된 세계를 지어가는 그 과정이 무조건 '아동 중심'이 되지만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 세계를 만나는 어린이 관객의 정직함이다. 어린이는 무엇이 '내' 취향을 건드리는지 즉각 반응하며 동시에 무대 위에 펼쳐지는 낯선 세계를 놀라울 만큼 유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창작자들은 자연스럽게 어린이들의 반응에 레이더를 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린이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응 속에서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이다.
어린이들은 너무 쉬운 교훈이나 결말 앞에서 갸우뚱하기도 한다. 과장된 몸짓과 목소리로 '어린이'를 연기하는 방식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반면 남자배우가 여성을 연기하는 것은 별 어려움 없이 받아들이고, 한 사람이 순식간에 여러 역할로 변하는 것을 즐긴다. 단순한 막대기 하나가 만들어내는 무한한 변신과 변형에 감탄한다. 어린이 관객들은 어른이 예상하는 곳에서 반드시 놀라지 않고, 어른이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외로 쉽게 받아들이더라는 것이다. 어른들이 꾸며낸 세계가 자신들의 놀이의 언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채고 환영하는 것이다.
대상화되는 시선을 알아채는 어린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다'는 말은 공연과 교육의 현장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상용한다. 그러나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자칫 한쪽이 다른 한 쪽에게 무엇인가를 일방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는 착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대상화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는데 그것은 어린이들도 마찬가지다. 때로 어린이는 어른이 기대하는 '어린이'를 기꺼이 연기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전부는 아니다. 일곱 살 아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른들은 우리가 아기이길 바라는 것 같아. 맘대로 머리를 쓰다듬거나 볼을 꼬집어. 기분이 나쁘지만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놀라운 것은 이 말 속에 두 가지 감각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싫은 행동 뒤에 놓인 애정 또한 알고 있다.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지우지 않는다.
또 다른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왜 이렇게 친절한 목소리로 말하는 거야? 겉은 따듯하지만 안은 차가워." 이 말들은 어린이가 대상화된 시선을 얼마나 예민하게 감지하는지를 보여준다.
대상화된 관계에는 전형성이 생긴다. 한 사람을 '어린이', '학생'과 같은 하나의 이름으로 바라보면 그 존재가 가진 복잡성과 개별성은 지워진다. 밋밋하고 단편적인 관계는 지루하게 느껴지고 그 안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감각을 느끼는 것이다.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과 실제의 자기 사이에 생기는 간극을 감지하는 그 불편한 감각은 그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만들어낸다. 그때 그 시선을 비껴가며 자신의 존엄을 드러내는 작은 행동이 시작된다. 몸을 비틀거나 알아 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거나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작은 행위들, 그것은 때로 은근하지만 강력한 주체적 표현인 것이다.
어린이와 어른은 모두 복잡한 관계망 속에 존재한다. 내가 궁금한 것은 어린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독립적인가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끊임없이 대상화 하는 사회와 환경 속에서도 어린이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이루어가는 가이다.
나는 오랫동안 공연장과 다양한 예술교육의 환경 속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하며 그 놀라운 생명력을 목격해왔다. 어린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경험 전체를 그대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안에서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기막히게 잡아채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가져간다. 어쩌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힘인지도 모른다. 무엇이 자신에게 살아있는 경험인지 변별하고 그 본질을 붙잡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생명의 존엄한 투쟁, 부드러운 직립에의 의지 말이다.
대상이 아닌 초대받은 존재
나는 어린이들과 함께하는 예술, 또는 예술교육의 장을 '제공'이라기보다 '초대'라고 부르곤 한다. 초대의 방식은 여러가지일 수 있다. 정성껏 차려 놓은 만찬에 부를 수도 있고, 각자 음식을 하나씩 가져오는 포트럭의 파티를 열 수도 있다. 완성된 공연을 보여주거나 참여의 여지를 남길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혹은 엉뚱한 요리사가 재료만 잔뜩 펼쳐놓고 "자, 이제 무얼 만들어 볼까?" 하며 다 함께 이상한 요리를 시작할 수도 있다. 초대의 장에서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공간을 만들 것인지, 무엇을 건네고 어디에서 기다릴지 세심한 설계를 한다. 무엇을 촘촘하게 하고 무엇을 성글게 비워둘 것인가를 오래 논의하게 된다. 어린이를 주체로 만난다는 것은 상호적인 일이다. 어른은 미적 판단과 경험을 통해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어린이를 그 세계에 초대한다. 그리고 어린이는 그 세계에 들어와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고, 느끼고 선택하며 때로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세계의 질서마저 바꾼다. 어린이의 세계에 창작자들과 작품이 초대되는 것이다. 예술에서의 공존은 바로 그 곳에서 시작된다.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싣고, 한번도 배워본 적이 없는 발레를 추는 여섯 살 아이가 말한다. "우리 발레 참 아름답지?"
봄 바람이 불어오는 사찰 마당, 꽃비가 내리자 주방 일하던 할머니들이 밖으로 나온다. 꽃잎이 흩날리는 가운데 한 할머니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한 바퀴를 돈다. 얼굴에는 해맑은 웃음이 가득한 채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워!" 그러자 다른 할머니들도 똑같이 돌며 "살아있네!" 하신다.
여섯 살 아이와 할머니 사이에는 긴 시간이라는 간극이 놓여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의 몸은 닿아 있다. 아름다운 것을 만났을 때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내어주고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몸. 어린이성은 나이로 구분되는 성질이 아니라 세계와 만나는 방식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깨어나는 어린이성
내 존재가 타인에 기대어 일어남을 알면서도 의존하지만 않고 스스로 해보려는 의지를 발현하고 있다면, 어제의 경험에 근거해 오늘은 나를 심판하지 않는다면, 내일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없이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을 온전히 껴안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린이’이다.
저 태양이 나를 위해 떠오르고, 저 별빛이 나를 위로하려 깜박이고 있음을 안다면, 때로 슬픔이 닥쳐올 때 무릎에 얼굴을 묻는 것으로 온 세상에 불을 꺼버리고 온 우주를 온전한 절망에 던져 넣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어린이’일 것이다.
이 세계의 시스템은 너무나 성글어서 새롭게 상상만 한다면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바꿔낼 수 있다고 믿는다면, 내가 모르는 것에 질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운 것 앞에서 감탄사를 내어놓기에 주저함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어린이’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린시절에만 잠시 존재하다 사라지는 어떤 미숙함이 아니라 어른이 된 우리 안에서도 끊임없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생명력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어린이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