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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는 단지 나의 피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뼛속에, 나의 배 속에, 나의 심장 속에, 나의 세포핵 속에, 나의 과거와 미래 속에 있다." (Karen Barad, 2007)
필자에게 어린이청소년극은 환대의 예술이다. 이 분야에 있으면서 자주 목격하게 되는 것은 타자를 향해 있는 창작자들의 환대하는 시선과 몸짓이다. 어린이청소년극의 현장에는 늘 지금 마주하고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시선 그리고 여기에서 피어나는 극적 세계를 그들과 함께 경험하기 위해 열려있는 몸과 초대하는 몸짓이 있다. 필자는 이런 순간을 목격할 때마다 왠지 뭉클해진다.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환대의 감각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예술적·사회적 경계들을 일시적으로 흐릿하게 만들면서 질문이라는 방식으로 잠시 잊고 있던 관계성을 감지하도록 한다. 지금 펼쳐지는 연극의 세계와 내 삶의 세계는 정말 다르기만 할까?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성인은 서로 다른 존재일까 아니면 내 안에 여전히 혹은 이미 존재하는 나의 다른 모습일까?
가끔 어린이를 만날 때면, 이러한 ‘환대하는 태도’와 ‘관계성의 감지’는 그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방식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주변에 있는 것들을 입에 넣어보며 사물과 감각으로 만나는 아주 어린 아이, 떨어진 낙엽을 보고 엄마에게 자신의 시작을 묻는 아이, 장난감 칼을 본 순간 광활한 바다에서 펼쳐졌던 과거의 전쟁을 상상하고 친구를 그 세계로 초대하는 아이까지. 이처럼 어린이의 일상은 초대와 상상, 무엇이 되기와 함께 놀기로 가득하다. 마치 그들의 일상 자체가 연극인 것처럼. 그래서 어린이청소년극을 하는 사람들은 어린이와 청소년과 만나는 일 그리고 인간뿐 아닌 수많은 비인간 존재까지도 자신의 삶에 자연스럽게 끌어안는 그들의 삶의 방식과 그 감수성을 이해하고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뜨거운 여름의 한가운데 진행되었던 2026 아시테지 국제여름축제의 국제 워크숍과 심포지엄, 국내 포럼을 경험한 며칠은, 필자에게 어린이청소년극 예술가들이 그러한 어린이의 삶의 방식과 감수성을 어떻게 자신의 창작 작업 안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지 고민하게 한 시간이었다. 또한 그와 같은 작업을 지속해 온 이들의 역사와 발자취를 기억하는 일이 지금 활동하는 예술가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를 경험하고 함께 고민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 글에서는 이 워크숍과 심포지엄, 포럼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을 개괄하기보다, 참여자로서 필자가 경험한 인상적인 순간을 중심으로 하여 개인적 체험과 성찰의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퍼포머가 사라지고 물질이 남는 순간: 코넬리아 뵈니쉬의 물질 안무
2026 아시테지 국제여름축제 - 코넬리아 뵈니쉬의 물질 안무 워크숍 현장
오스트리아 토이하우스 씨어터의 공동 예술감독인 코넬리아 뵈니쉬의 ‘물질 안무(Material Choreography) 워크숍’ 중 어느 한순간, 참가자들은 바닥에 놓인 각기 다른 모양과 질감의 천 중에서 하나를 고른 후 탐색하기 시작했다. 천의 모양을 관찰하는 사람, 질감에 집중하는 사람, 이리저리 움직여볼 때 나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있었고, 천이 주는 감각에 따라 함께 몸을 움직여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코넬리아는 그들의 탐색을 지켜본 후 인상적인 탐색의 순간들을 직접 재현해 보였는데, 그 핵심은 ‘천천히 반복하고 작은 변화를 알아채기’였다. 코넬리아가 반투명한 시폰 재질의 부채주름을 지닌, 상체를 딱 덮을 만한 크기 천의 양 모서리를 잡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천천히 조심스럽게 흔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 시야는 마치 카메라가 서서히 줌 인을 하듯 아주 조금씩 살며시 흔들리는 천의 모서리에 주목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 모서리의 작은 흔들림을 통해 천과 부딪히는 바람을 보았고 그 바람의 모양은 그 순간 모서리와 연결된 부분의 주름이 흔들리는 모습을 통해 선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필자는 워크숍 참가자들의 얼굴에 맺힌 작은 땀방울을 알아채며 이 워크숍에 열중하고 있는 참가자들에게서 나온 열기가 이 공간을 서서히 데우고 있고, 그렇게 변화한 온도가 그 천을 흔들리게 하는 바람의 모양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퍼포머가 안무로서 물질을 둘러싼 그 순간의 생태계를 목격하게 하면서 자신도 그 안의 하나인 듯 스며든 것이다.
이 경험은 필자가 과거에 마주쳤던 어느 어린이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어쩜 저리도 지치지 않는 걸까?’ 마로니에 공원에서 한시도 멈추지 않고 종횡무진 활보하는 어린이를 보면서 가졌던 물음이다. 오랜만에 우연히 마주친 친구와 짧은 대화를 나눈 후, 그 대화가 목적을 상실해 이별을 부추기는 침묵을 낳았던 짧은 사이. 친구의 자녀였던 그 아이는 수많은 만남의 한가운데 있었다. 작은 화단 가에 난 잡초를 만지고는 멀리 있는 무언가를 향해 달려갔다가, 쏜살같이 돌아와선 아빠의 손을 끌어당기며 자신의 경험으로 초대하려 했다. 다시 생각하니 그 순간 나의 세계에는 반가운 친구와의 짧은 대화가 전부였지만, 그 아이의 세계는 마로니에 공원이라는 공간을 이루고 있던 자연, 사물, 인간 등의 수많은 것들을 끌어안고 있던 것이다. 코넬리아의 워크숍에서 목격한 물질의 생명성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경험한 주변 생태계에 대한 섬세한 인식은 어린이가 일상에서 세계와 대면하는 시선과 통할 수 있는 길은 아니었을까.
개인의 음악과 공동의 음악이 공존하는 다성적 순간: 제레미 해리슨의 음악성
2026 아시테지 국제여름축제 - 국제 심포지엄 현장
영국 런던의 로즈 브루포드 칼리지에서 액터뮤지션 및 아동청소년극 대학원 과정을 이끌고 있는 예술가이자 연구자, 교육자인 제레미 해리슨은 심포지엄에서 자신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으로 ‘음악성(musicality)’ 개념을 소개했다. 이는 음악을 단순한 소리와 멜로디로 인식하기보다 개인의 내면 풍경과 고유의 리듬을 탐색하는 매체로 바라보고, 음악을 통해 서로의 리듬을 존중하며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호흡하는 공동체적 순간을 이뤄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예술가로서 지역 사회에서 오랫동안 작업하며 이러한 음악성의 탐구를 발전시켜 왔는데, 주로 말을 하기 전 단계의 영유아들 그리고 말하기를 주된 의사소통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한 특수학교의 장애를 지닌 아이들과의 작업에서 흥미로운 방식으로 지속하고 있었다. 
2026 아시테지 국제여름축제 - 제레미 해리슨의 음악과 음악성을 통한 연극창작 워크숍 현장
심포지엄 전날에 진행된 워크숍에서 이 ‘음악성’이 무엇인지 경험할 수 있는 순간들이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워크숍의 시작 때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제레미는 어린 시절 연극을 볼 때 오케스트라 피트에 놓인 악기들에 시선을 빼앗겼던 기억을 공유하며, 어린이에게는 악기도 배우와 마찬가지로 극장에서 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라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칼림바를 꺼내며 함께 이 악기를 어린이의 마음으로 탐험해 보자는 말을 건네며, 자신이 먼저 호기심 어린 눈빛과 손가락 움직임으로 악기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단지 몇 차례의 작은 움직임이 악기를 울리는 동안 그는 즉시 자신만의 리듬을 찾아냈고, 이윽고 목소리라는 악기를 얹어 그에 조응하는 화음으로 제. 레. 미라는 이름을 말하며 고유한 음악을 완성했다. 그리고 그 단순한 멜로디와 목소리로 탄생한 음악은 그가 견지해 온 삶과 예술에 대한 태도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그의 온도를 마법처럼 모두의 마음에 스며들도록 해주었다. 그때 모두는 어떠한 설명 없이도 그가 오랜 시간 각기 다른 고유성을 지닌 어린이들과 현장에서 만나며 일궈 온 ‘음악성’의 세계로 초대되었고, 이어 각자의 고유한 음악이 이어졌다.
‘우리의 다름은 서로의 세계로 이끌어 연루되게 한다.’ 필자가 최근 3년간 뇌성마비 장애와 함께하는 분들을 만나면서 갖게 된 생각이다. 그들이 지닌 각기 다른 방식의 언어와 몸짓은 개인이 가진 고유성에 주목하게 하고, 거기에 귀를 기울일 때 점차 그 언어가 들리고 몸짓이 읽히면서 서로의 언어가 함께 조금씩 변화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어떤 화음을 이루듯이. 제레미가 워크숍 중 특수 학급에서의 연극작업을 공유해 줄 때 울컥했던 건 이 때문일 거다. 그가 매주 45분씩 찾아가는 교실에서는 언제나 ‘그날만의 연극’이 펼쳐진다. 그가 어느 아이의 그날의 기분을 감지하고 어떤 음악으로 조심스레 초대를 건네면, 그 아이는 작은 손짓 혹은 미세한 음성으로 그 초대에 응한다. 어떤 날은 초대에 응하지 않고 악기를 뺏길 때도 있지만 그 또한 그날의 음악과 연극을 시작하는 그 아이만의 초대의 방식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고유한 리듬은 무엇을 표현하고 거기에 귀를 기울일 때 자신의 음악이 되며, 그 순간을 함께 하는 이가 그 음악을 존중하며 자신의 음악을 건네면 공동의 음악이 시작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린이의 일상에서 매일 같이 펼쳐지는 놀이는, 어린이가 사물 또는 누군가와 함께 서로를 탐색하며 자신만의 음악을 발견하고 공동의 음악을 작곡해 가는 행위인 것은 아닐까.
어느 역사 안에 내가 존재한다는 감각: 국내 포럼 들여다보기
“세 분의 발표를 보며, 제가 이 역사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감각을 느꼈어요. 그게 마음을 울리고 위로가 돼요. 작업을 하다 보면 ‘누가 이걸 봐줄까?’라는 회의감이 들 때가 많거든요.” ![[1]4.png](https://assitejkorea.org/Uploads/SmartEditor/2026-09-01/[1]4.png)
2026 아시테지 국제여름축제 - 어린이청소년극IN X 포럼 현장
예술가로서 어린이청소년극 작업을 하며 어려움에 봉착할 때면, 괜히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만 같다는 서러움이 문득 올라올 때가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 관객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힘을 얻고는 하지만, 그 만남을 위한 과정은 무척 고독하다. 국내 포럼 1부 ‘한국 어린이청소년극의 생태계 들여다보기’의 세 발표가 끝난 후, 질의자 손혜정 예술가가 질의 시간을 시작하며 꺼낸 이 말은 어린이청소년극의 역사와 생태계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감지하는 것이 이 분야의 예술가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를 느끼게 했다. 손증상 연구교수는 한국 어린이청소년극의 기원 및 초기 역사와 그 의미를 주목하게 했고, 손서희 연구자는 80년대 이후 어린이청소년극 분야의 큰 변화 양상들을 자세히 살피면서도 그 시기를 경험한 예술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했으며, 남지수 평론가는 그런 현장을 더 풍성하게 하며 역사를 함께 견인해 온 비평 담론의 흐름과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필자 또한 이러한 역사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감각은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나의 동료가 존재한다는 위안을 주며 다음 작업으로 나아가게끔 하는 힘이 되었다.
2부의 라운드 테이블 ‘작지만 능동적인 관객을 위한 탐색과 도전’에서는 어린이청소년극에서 대상 관객인 어린이와 청소년의 참여와 그 관계에 대해 고민하여 현장에서 작업을 해 나가는 젊은 창작자와 비평가의 발표가 이어졌다. 박주아 창작연구자의 발표 ‘영유아극에서의 재미와 예술성’에서는 특히 극장을 벗어나 일상과 가까운 공연 현장에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어린이 관객과 맞닥뜨리는 순간의 희열과 그 미학적 가치에 주목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김수빈 창작연구자의 발표에서는 관객 참여 공연 형식에서 역할의 혼란을 느끼는 예술가들의 모습에 주목하여 어린이의 참여가 공연의 형식과 예술가와의 관계 구조를 재구성하는 수행적 역할을 해냈다는 성찰적인 상상력을, 김연수 평론가는 동시대 청소년극에서 예술적 감각을 공유하고 미학적 선택을 함께 능동적으로 고민하는 공동창작자로서의 청소년의 미학적 위상의 변화 양상과 그 한계 그리고 그 협업 과정을 응시하는 질문의 방식까지 섬세하게 짚어주었다. 1부가 한국 어린이청소년극의 역사와 그것이 이뤄 온 생태계를 감지할 수 있도록 그려줬다면, 2부는 그 생태계가 어떻게 변화하면서 외연을 확장하고 내연이 깊어지며 발전되어 갈지를 흥미롭게 상상할 수 있게 했다. 어린이청소년극은 언제나 늘 생생히 살아있고 변화하고 있었다.
마치며: 이미 서로에게 건네졌던 환대를 알아채고 응답하기
글머리에 옮긴 바라드의 문장으로 돌아가 본다. 타자는 단지 나의 피부 안이 아니라 내 뼈와 배와 심장과 세포핵 속에 그리고 나의 과거와 미래 속에 있다는 그 말. 바라드는 이 문장 뒤에 설명을 더 덧붙였다. 기억이란 머릿속에서 지난 일을 떠올리는 능력이 아니라, 몸이 그동안 맺어온 관계들을 다시 이어가는 일이며 그렇게 몸이 무엇이 되어가 온 그 역사와도 같다고. 그러니 타자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은 신비로운 비유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이미 수많은 존재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던 관계들과 그 시간으로 엮여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번 며칠 동안 경험한 것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사실을 감지하는 일이었다. 코넬리아의 천으로부터 사물과 공기와 서로의 체온이 이미 하나의 생태계로 얽혀있었음을 보았고, 제레미의 칼림바로부터는 저마다의 다른 리듬이 어떻게 잠시 공동의 음악이 될 수 있는지를 경험했다. 그리고 포럼에서는 나라는 예술가가 어느 역사 안에 이미 놓여 있으며 보이지 않는 곳에 동료가 있다는 감각 또한 얻었다. 바라드의 말처럼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로도 이미 서로에게 얽혀있으며, 그렇기에 서로에게 응답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린이청소년극이 하는 일이 바로 그 응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미 내 안에 존재하나 미처 알아채지 못한 어린이라는, 사물과 세계라는 타자를 뒤늦게 감지하고 그 얽힘에 응답하려는 감각적이고 역사적인 감수성을 발휘하는 것. 그것은 어린이가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성인이 된 우리는 그 감수성을 예술이라는 방식으로 되찾으려 애쓰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뒤늦게 건네는 우리의 알아차림의 시선은 글머리에서 이야기했던 환대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우리가 어린이와 청소년을 환대한다고 여겨 온 그 몸짓은 실은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던 그들에게 뒤늦게 응답하는 일이었고, 동시에 그들이 먼저 우리에게 건네 왔던 환대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다. 그 응답의 순간마다 우리의 고독은 잠시 충만함이 된다.
참고문헌
Karen Barad, Meeting the Universe Halfway: Quantum Physics and the Entanglement of Matter and Meaning,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07. P.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