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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어린이청소년극의 티켓은 대체로 두 층위에서 판매된다. 하나는 실제 관객과 보호자가 구매하는 시장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기관, 지역문화재단, 공공극장, 복지기관 등이 작품을 선택하고 초청하는 시장이다. 따라서 어린이청소년극의 지속가능성을 말하려면 한 작품의 일회성 티켓판매 실적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작품이 반복해서 선택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새로운 관객과 만나며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가.
‘잘 팔리는 어린이청소년극’을 만드는 일은 좋은 작품을 만드는 일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작품을 만들어 검증하고, 수정하고, 유통하고,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공연되어 관객과의 경험을 확장하고, 그 경험을 다시 다음 창작으로 연결하는 생태계가 필요하다. 작품의 성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작품 바깥에 있는 수많은 조건들이다. 공공정책과 재원, 극장과 공간, 전문인력, 유통조직, 학교와 교육기관, 비평과 연구,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주체의 연결이다. 어쩌면 어린이청소년극의 ‘인프라’는 물리적 인프라와 함께 인적·정책적·예술적 인프라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가 더 중요한 질문일 수 있다.
좋은 작품이 오래 살아남는 구조
인프라를 말하기에 앞서 먼저 창작단체 스스로의 제작 관성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많은 단체가 지원사업의 단년도 구조 속에서 ‘신작 제작–공연–종료’ 사이클을 반복한다. 그러나 어린이청소년극에서는 초연 자체보다 레퍼토리화 가능성이 더 중요하다. 좋은 작품은 여러 지역의 다양한 규모의 공간, 여러 연령대, 학교 현장과 극장 환경을 오가며 살아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작품을 만드는 순간부터 ‘여러 번 선택될 수 있는 구조’로 설계할 필요가 있다.
이동이 쉬운 기동성 있는 무대(기술), 배우와 기술 스태프 규모의 탄력성, 공연 후 대화나 워크숍 등 부대행사와의 결합 가능성, 교육자료 개발 가능성 등이 창작 단계에서부터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학교용 버전, 공공극장용 버전, 축제용 버전, 소극장 장기 공연용 버전 등 작품이 놓이는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변형될 수 있다면 하나의 작품이 만날 수 있는 시장도 자연스럽게 넓어질 것이다.
극단 하땅세는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오래 고민해왔다. 하땅세는 개발 단계에서부터 배우와 기술 인원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 소품과 장비가 이동 가능한지, 현지 공연장의 장비로 무엇을 대체할 수 있는지, 설치와 철수에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지, 다회차 공연이 가능한지, 언어를 줄여도 작품이 이해되는지, 무대 크기가 달라져도 핵심 이미지가 유지되는지 등 투어 방법을 함께 검토한다. 좋은 작품과 이동 가능한 작품은 서로 다르다는 윤시중 연출의 현장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다.
이런 접근은 단순히 ’작품을 작게 만드는 것‘과는 다른 접근이다. 하땅세는 공간에 따라 작품을 확대하거나 축소하면서 그 공간에서 관객이 경험하는 방식 자체를 다시 설계한다. 자체 소극장에서는 밀도 높은 버전으로, 지역 문예회관에서는 일반 버전으로, 대극장이나 축제에서는 확장 버전으로 변형될 수 있다면 작품의 유통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진다.
상상마루의 엄동열 대표 역시 어린이 공연의 지속가능성을 “한 번 잘 판매하는 것”과 구분해 설명했다. 상상마루가 제작한 가족 뮤지컬 <캣 조르바>는 국내 공연을 거듭하며 수정되고 성장한 뒤 해외 쇼케이스를 거쳐 베트남 국립극장인 베트남청소년극장과 약 2년에 걸친 공동개발을 통해 현지 배우들이 베트남어로 공연하는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초연에서 해외 현지 레퍼토리로 이어지기까지 약 10년이 걸린 셈이다. 엄동열 대표가 이 경험을 통해 얻은 결론은 분명해 보인다. 어린이 공연의 유통은 작품을 한 번 잘 판매하는 일이 아니라, 작품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정하고 그 길을 함께 갈 파트너와 오랜 관계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창작단체에 필요한 것은 창작 역량만이 아니다. 작품의 ‘생애’를 설계하는 역량도 필요하다. 유아, 초등 저학년, 초등 고학년, 중학생, 청소년 후기 등 관객군별 대표 레퍼토리를 축적하고, 작품이 초연에서 끝나지 않고 몇 년 뒤에도 다시 선택될 수 있도록 관리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초연 지원에서 순환 지원 정책으로
이런 창작단체의 노력을 가능하게 하려면 공공지원의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지금까지의 지원정책이 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에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재공연, 재유통, 개작, 재제작, 투어링까지 지원의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크리에이티브 스코틀랜드(Creative Scotland)의 투어링 펀드(Touring Fund)는 참고할 만하다. 투어링 펀드는 성공한 과거 작품의 리바이벌, 연구개발을 마친 작품, 아직 제작되지 않았지만 순회가 예정된 작품 등을 지원하고, 공연이 스코틀랜드 전역의 더 많은 지역과 관객에게 도달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공연장이 부담해야 하는 재정적 위험을 줄여 작품의 순회를 촉진하는 구조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중요한 것은 지원의 중심을 ‘초연’에서 ‘순환’으로 옮긴다는 데 있다.
국내에서도 이제는 공모사업의 개수를 늘리는 것보다 지원의 설계 원리를 바꿀 필요가 있다. 어린이청소년극은 많은 예술지원에서는 ‘교육적’이라는 이유로, 반대로 교육지원에서는 ‘예술적’이라는 이유로, 다시 말해 교육과 예술, 복지와 문화의 경계에 걸쳐 있다는 이유로 충분한 우선순위를 받지 못해왔다. 미국 전미예술기금(NEA)의 「젊은 관객을 위해 미래 극장 구상(Envisioning the Future of Theater for Young Audiences)」 역시 TYA가 이러한 제도적 사각지대에 놓여 있음을 지적한다. 예술 지원기관은 TYA를 ‘예술이 아닌 교육’으로, 교육 지원기관은 ‘교육이 아닌 예술’로 바라보면서 지원에서 배제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이를 넘어 일반 극장과의 협업, 지역을 넘나드는 공동유통, 조직의 지속가능성을 지원하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어린이청소년극 지원사업’이 아니라, 작품의 생애주기를 지원하는 정책이라는 사실이다. 신작 한 편의 제작비를 지원하는 게 아니라 2~4편의 대표 레퍼토리를 3~5년에 걸쳐 유지·개선·순회하는 비용을 지원하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다. 공공극장 역시 완성된 작품을 구매하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제작사와 3~5년의 긴 호흡으로 공동개발하고 초연하며 투어하는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엄동열 대표가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시설을 만드는 것도 인프라이고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것도 인프라이며 유통망을 만드는 것도 인프라지만, 이 모든 것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인프라는 결국 사람과 사람이 신뢰를 쌓으며 오래 협력할 수 있는 시간과 구조라는 것이다.
작품과 시장을 연결하는 코디네이터
그렇다면 작품과 학교, 극장, 지역을 연결하는 일은 누가 담당해야 할까. 지금의 어린이청소년극 유통에서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이 역할을 사실상 창작단체가 떠맡고 있다는 데 있다. 창작자는 작품을 만들면서 동시에 공연장을 찾고, 학교를 찾아가 계약하고, 홍보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투어 일정을 조율해야 한다. 결국 제작자이자 영업자이고, 교육기획자이자 투어 매니저가 된다. 시장을 연결하는 중간조직과 전문인력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엠제이플래닛의 오준석 대표가 청소년 공연 활성화를 위해 제안한 세 가지 방안은 이 문제를 정확하게 짚고 있다. 그는 현재 학교 공연의 문제를 작품의 부족보다 ‘구조의 부족’으로 이야기한다. 학교 공연이 대부분 일회성 사업으로 운영되면서 예산이 있으면 공연을 보고, 없으면 보지 못하는 구조가 반복되고, 그 안에서 학교는 수동적인 소비자가 되고 예술단체는 단발성 공급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학교와 예술단체, 지역문화재단, 교육청이 각각의 역할을 맡는 연결 구조다. 우수 작품의 창작과 제작은 문체부나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학교의 관람 예산은 교육청이, 학교와 단체를 연결하고 운영하는 역할은 지역문화재단이 맡고, 학교는 작품을 선택하며 예술단체는 공연과 함께 사전·사후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식이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각각의 기관이 잘할 수 있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연결될 때 비로소 일회성 관람사업이 지속가능한 생태계로 전환될 수 있다.
그의 제안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공연예술 코디네이터‘다. 단순히 공연을 판매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코디네이터는 학교의 상황과 예술단체의 언어를 서로 번역하는 사람이다. 교사가 작품의 적합성과 안전성, 교육과정과의 연계 가능성, 공연 이후 활동까지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작품을 소개하고 학교의 조건을 이해하며 사전·사후 프로그램을 제안하고 학교와 단체 사이의 신뢰를 만들어가는 역할이다. 교육지원청이나 지역재단에 한 명의 전문 코디네이터만 있어도 학교는 안정적으로 공연을 선택할 수 있고, 예술단체 역시 단순 공급자가 아니라 교육적 파트너로 학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제안은 어린이청소년극의 유통 인프라를 생각할 때 상당히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지금 필요한 것은 거대한 플랫폼 하나를 만드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학교와 극장, 예술단체, 교육청, 문화재단 사이의 거래비용과 정보의 비대칭을 줄이는 사람일 수 있다.
작품 정보, 기술 조건, 권장 연령, 교육 연계 자료, 관람 후기, 이전 초청 실적 등을 표준화한 데이터베이스와 함께 전문 코디네이터가 존재한다면, 학교와 지역기관은 작품을 선택하기 수월해지고 창작단체 역시 영업 대신 창작과 레퍼토리 관리에 집중할 수 있다.
학교를 관객이 아니라 파트너로
여기서 학교의 역할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린이청소년극에서 관객은 스스로 문화소비를 결정하지 않는다. 특히 학교 공연의 경우 교사와 학교, 교육청, 지역기관, 보호자가 관람을 결정하는 중요한 주체가 된다. 따라서 관객개발은 단순히 SNS 광고를 늘리는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교사에게 작품을 설명할 수 있는 자료, 사전·사후 수업안, 학부모용 안내문, 학생 참여형 워크숍 등이 필요하다. 어린이청소년극은 홍보물만 파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교육 현장의 언어로 번역한 자료까지 함께 제공해야 한다.
동시에 학교가 단순히 무료 공연을 제공받는 수혜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준석 대표는 일부라도 학교가 비용을 부담하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비용의 규모가 아니다. 학교가 비용을 부담한다는 것은 공연을 선택하고, 학생들에게 소개하고, 공연 이후의 활동까지 고민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모든 비용을 외부에서 지원하면 공연이 ’좋은 일이니까 한번 와서 보여주고 가는 행사‘가 되기 쉽지만, 학교가 일정 부분 참여하면 공연은 학교 교육과정 안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커진다.
이런 구조는 어린이청소년극의 공공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할 수 있다. 공공지원은 모든 비용을 대신 지불하는 방식이 아니라, 학교가 작품을 선택하고 비용을 일부 분담할 수 있도록 매칭하는 방식으로 설계될 수 있다. 작품을 선택하는 주체가 생기고, 선택에 대한 책임이 생기며, 공연 이후의 교육적 경험까지 함께 설계하게 되기 때문이다.
영국 예술위원회(Arts Council England)가 아동·청소년의 창의적 경험을 위해 교육부, 문화 부처, 문화예술기관, 학교, 지방정부, 고등·평생교육기관 등과 협력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개별 프로그램의 예산 규모만이 아니라 교육과 문화의 협력을 제도의 상수로 두는 방식이다.
스코틀랜드의 이매지네이트(Imaginate) 역시 좋은 사례다. 에든버러 국제어린이페스티벌을 운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코틀랜드 예술가와 프리랜서를 위한 창작개발 프로그램, 레지던시와 워크숍, 멘토링, 국제 프로젝트, 학교와 커뮤니티를 연결하는 연중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한다. 공연 발표, 예술가 양성, 학교 연계, 국제교류가 서로 분절되지 않고 하나의 체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축제와 학교연계 사업, 예술가 지원사업을 서로 다른 사업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의 어린이청소년극 생태계 안에서 연결할 필요가 있다.
공연장의 제작 인프라로서의 기능
인프라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공연장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공연장의 숫자보다 그 공간이 어떤 기능을 수행하느냐다.
극단 하땅세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하땅세는 하땅세극장과 라이트하우스 등의 자체 공간을 작품의 발표 장소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가 레퍼토리를 훈련하는 연습장이자 그 결과물을 관객 앞에서 시험하는 일종의 실험실, 나아가 지역 공연 전 장비와 동선을 점검하는 투어 베이스, 문예회관 관계자와 해외 프로그래머를 초청하는 쇼룸, 기존 작품을 다른 규모로 변형하는 제작 공간으로 활용한다. 이렇게 공간을 활용한 결과, 작품을 대관 기간에 맞춰 급하게 완성하는 대신 여러 차례 공개하고 수정하면서 완성하게 된다. 결국 좋은 공연을 만드는 물리적 인프라는 단순한 객석과 무대가 아니라 창작-실험-수정-훈련-유통이 순환하는 공간이다.
상상마루 역시 이러한 공간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다. 엄동열 대표는 “어느 극장에서 공연할 것인가”보다 “어떤 공간에서 어떤 관객 경험을 만들 것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상상마루의 <제페토의 작업실>은 전시와 연극, 예술체험을 결합해 어린이가 객석에 앉아 바라보는 관객에 머무르지 않고 공간을 직접 돌아다니며 보고, 만지고, 만드는 경험을 설계했다. 구리의 전시공간에서 출발한 작품은 다른 지역문화재단을 거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 어린이극장에서 공연되었다. 프로시니엄 극장에만 묶이지 않는 작품이 되면서 작품이 만날 수 있는 공간과 관객의 범위도 넓어진 것이다.
이것은 어린이청소년극의 물리적 인프라를 확장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공연장만이 아니라 갤러리, 도서관, 전시장, 문화공간 등 기존 공간을 공연의 장소로 전환할 수 있다면 어린이청소년극이 관객을 만나는 접점은 훨씬 넓어진다.
외부 전문인력을 통한 심화와 확장
어린이청소년극은 특히 다양한 외부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다. 발달심리, 아동권리, 청소년 당사자성, 장애 접근성, 감각 친화 환경, 안전한 제작환경, 디지털 윤리, 학교 제도와 법률 등 창작자만의 전문성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다.
따라서 아동 심리 전문가와의 협업을 통해 연령별 수용 가능성과 정서적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청소년 관련 법률 전문가와 학교 연계, 개인정보, 촬영과 기록, 보호자 동의, 노동과 안전 문제를 점검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신경다양성 관객을 고려한 감각친화형 공연이나 릴렉스드 퍼포먼스와 같은 접근성 기준 역시 앞으로는 선택적인 ‘배려’가 아니라 어린이청소년극의 기본적인 제작 역량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하땅세가 오랜 기간 다양한 외부 전문가와 워크숍을 진행하고 이를 단체의 창작 언어로 축적해온 과정은 전문인력 인프라의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초기에는 해외 연출가와 배우, 움직임·화술 전문가 등의 메소드를 받아들이는 데 집중했다면, 이후에는 이를 개별 작품과 레퍼토리에 적용하면서 하땅세 고유의 연기 메소드로 발전시켰다. 최근에는 배우 훈련에 머물지 않고 관객개발, 브랜딩, 비평, 해외 공연예술 트렌드, 국제 공동제작 등으로 학습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또한 중요한 외부인력으로 비평과 연구, 기록 인력을 언급해야 할 듯하다. 어린이청소년극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작품을 평가하고 맥락화하며, 창작과정을 기록하고, 관객의 경험을 연구하고, 유통 데이터를 축적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어떤 작품이 어떤 연령대에서 어떤 반응을 얻었는지, 어떤 지역에서 반복적으로 선택되었는지, 학교 관람 이후 어떤 교육적 활동이 이어졌는지, 작품의 어떤 형식이 투어에 적합했는지 등의 데이터가 쌓여야 창작단체도 다음 작품을 전략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 작품 선택자 역시 무엇을 근거로 초청할지 판단할 수 있고, 공공기관도 어떤 지원이 실제로 관객 확대와 작품의 생명 연장에 기여했는지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비평과 연구는 시장과 동떨어진 활동이 아니다. 오히려 시장의 신뢰를 만드는 장치다. 작품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고 선택을 도와줄 전문가가 없다면 학교와 지역기관은 익숙한 작품이나 유명한 단체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작품에 대한 충분한 정보와 비평, 관객 데이터, 이전 공연의 기록이 축적되어 있다면 작품 선택의 폭은 넓어진다.
‘잘 팔리는 공연’의 의미를 다시 정의한다면
결국 어린이청소년극의 인프라는 하나의 거대한 시설이나 하나의 지원사업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창작단체가 작품을 레퍼토리와 패키지의 관점에서 만들고, 공공기관이 초연 지원에서 재공연·유통 지원으로 축을 옮기며, 공공극장이 작품의 장기적인 공동제작자이자 유통 파트너가 되고, 학교와 지역사회가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라 작품을 선택하고 비용과 경험을 함께 분담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전문 코디네이터와 프로듀서, 큐레이터 같은 중간 인력이 있어야 한다. 단순한 분업의 문제가 아니다. 창작자가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시장과 교육 현장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전문적으로 연결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엄동열 대표가 말하는 ‘방향’과 ‘긴 호흡의 협업’, 오준석 대표가 강조하는 ‘학교와 예술단체를 연결하는 구조와 코디네이터’, 윤시중 연출이 보여주는 ‘작품의 이동성을 창작 단계부터 설계하고 공간과 제작·유통 조직을 결합하는 방식’은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종합할 수 있다. 어린이청소년극의 지속가능성은 작품 한 편의 완성도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작품이 어디로 갈 수 있는지, 누구와 함께 갈 수 있는지,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상상마루의 경험에서 한 작품이 국내 초연에서 해외 현지 레퍼토리로 자리 잡기까지 거의 10년의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좋은 어린이청소년극의 생명은 단년도로 끝나지 않는다. 하땅세의 사례처럼 작품을 반복해서 실험하고 공간과 규모에 맞게 변형할 수 있어야 하고, 오준석 대표의 제안처럼 학교가 작품을 선택하고 예술단체와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는 연결 구조가 있어야 한다. 결국 작품의 생애를 길게 바라보는 정책과 유통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잘 팔리는 어린이청소년극'이란 단순히 티켓이 많이 팔리는 작품만이 잘 팔리는 작품은 아니다. 오래 살아남아 더 많은 지역으로 이동하고, 더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만나고, 그 과정에서 수정되고 성장하며, 새로운 창작자에게 다음 작품을 만들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진정 ‘잘 팔리는’ 공연이다. 한편 시설을 만드는 것도,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것도, 유통망을 만드는 것도 모두 인프라인데, 이중 가장 중요한 인프라는 결국 사람과 사람이 신뢰를 쌓으며 오래 협력할 수 있는 구조일 것이다.
나가며
어린이청소년극은 흔히 ‘미래 관객을 키우는 예술’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어린이청소년극은 미래의 관객을 만들기 위한 교육적 수단이기 이전에, 지금 여기의 어린이와 청소년을 하나의 독립적인 관객이자 시민으로 대우하는 예술이다.
어린이청소년극의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어린이와 청소년을 어떤 존재로 바라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그들을 위해 얼마나 좋은 극장을 지을 것인가만이 아니라, 얼마나 좋은 작품을 만들고, 얼마나 오래 지원하고, 얼마나 쉽게 작품을 선택할 수 있게 하며, 얼마나 많은 전문가가 그들의 감각과 권리를 이해하고, 얼마나 다양한 공간에서 공연을 경험할 수 있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좋은 작품은 이미 많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 작품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구조, 창작자가 소진되지 않도록 하는 구조, 학교와 지역이 좋은 작품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구조, 그리고 어린이와 청소년이 더 자주 공연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구조다. 결국 작품의 문제가 아니라 생태계의 문제다. 그리고 그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구축해야 할 가장 중요한 어린이청소년극의 인프라일 것이다.